환상(幻想)즉흥(卽興)곡
‘Fantaisie-Impromptu’
문 혜 자
고전역학으로부터 양자역학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빛의 원리를 규정하려 했다.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기하학의 창시자인 유클리드(Euclid, B.C.300?)는 빛이 직선으로 진행한다고 주장했고, 데카르트(Descartes, René, 1596~1650)는 색이란 빛이 물체에 닿았을 때 변형되어 생긴다고 했다. 이후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시대의 빛은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흰색 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더불어 뉴턴은 색깔이 흰색 빛에 어둠이 섞여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화가들은 경험을 통해 색깔에 아무리 흰색을 섞어도 색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전적 가설은 아직 실증과 선험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빛과 소리는 굴절한다. 둘의 공통점은 파장과 중력이다. 차이점은 질량과 길이 그리고 속도이다. 빛은 질량이 없지만 소리는 공간의 특수성에 따라서 생성되기도 한다. 기원 전 300년이나 2020년인 지금도 빛과 소리는 여전히 중력에 의해서 휘어지며, 그 파장은 영속적이지 않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오래된 이미지는 소리를 유선운동으로 빛은 일직선운동으로 정의한다. 언뜻 우리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빛의 원리와 상관없이 물질과 현상을 이해하는 개인(예술가)의 인식이 인지보다 우선일 수 있다. 시각적 익숙함은 과학적 판단과 개연성이 적다. 혹자는 양자역학을 ‘양자론의 최종 수학 공식’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수학적 결정이 인간적 창조자(Creator)의 사유 앞에서 무용하다. 본 것을 기록하고, 기억을 재정립하여, 세계를 재현하는 예술가의 생경한(Uncanny) 선택 앞에서 관객이 합목적적 의심을 심사숙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시대를 거슬러 유클리드의 초기 기하학적 제스처가 작동한 그녀의 원시적 회화는 마치 역사 속 거대한 자연재해를 다시 여기에 구현한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환상 즉흥곡은 일종의 표피적 사유가 창조한 인지부조화의 세계인데, 이것은 역사를 거슬러보면 막 근대성이 등장하였던 시절 즉흥적 성향의 예술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산업혁명은 기술발달을 통해 인류에게 전기보급과 그것을 저장할 수 있는 기계장치로 설명되었지만, 당시 낭만주의적 예술가에게 전기는 작동원리나 산업적 중요성보다, 길거리 나열된 가로등이 늦은 밤 동시에 켜질 때 펼쳐지는 거대한 도시 섬광 같은 것이었다. 파리의 살롱과 야경을 묘사한 작품들이 유독 인상파나 낭만파 화가들에게 많이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제는 뇌리에 새겨진 최초의 환영을 일생 동안 호출하는 화가의 의지를 미덕이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즉흥곡처럼, 그 묘하고 낯선 열정이 시대를 넘어 꾸준히 연주되어야만 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문혜자에게 빛은 원자운동의 결과이기 이전 어느 때에 일어난 어떤 명확한 사건이다. 따라서 그 서사는 음악만큼 정교하고 단단한 구성을 갖추어야 한다. 빠른 화성 변화, 아르페지오의 호흡, 풍부하면서 극적인 칸타빌레처럼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화려하면서도 격정적인, 그러나 반드시 어디선가 시작된 생명처럼,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의 사건이 입자와 파동 사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때 빛이 발생되고, 우리는 그 수많은 빛이 지구에 머무른 순간들을 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작가(Creator)는 그 시간들 가운데 자신이 관찰한 섬광과 선율의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 캔버스 위에는 목격된 사건의 상(image)만이 남는다. 인간 문혜자는 자신의 말처럼 ‘비움’이라는 변증법적 추리를 통해 모든 중력과 관계한 양자역학의 법칙으로부터 나와 당신의 의미를 해방시키려는 것이다.
강나무_Art essayist, Independent Curator